2평 주방 공간 개선하기 — 21일 기록

이사 첫 주, 나는 프라이팬 하나를 꺼내 햇볕 든 창틀 위에 올려두었다. 놓을 데가 없어서였다. 씽크대는 손바닥 두 개를 겨우 펼칠 크기였고, 가스레인지 오른쪽에 칼 하나 내려둘 만한 여백도 없었다. 문 닫는 소리만 나면 냄비 뚜껑이 딸깍거리며 흔들렸다. 그날부터 2평 주방을 실제로 쓰는 주방으로 바꾸는 21일 기록을 시작했다. 새 가구를 들이기보다는, 매일 저녁 20분씩만 손을 보자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했다.

1~3일차: 빈자리 만들기

첫날은 요리를 하지 않았다. 대신, 주방에서 음식과 상관없는 것들을 모두 꺼냈다. 공구, 테이프, 우편물, 여행용 머그컵… “언젠가 쓸 것”들은 싱크대 아래 상자로 옮겼다. 그 상자는 현관에 나란히 놓였다. 공간이 넓어진 건 아니었지만, 빈 면이 생겼다. 놀랍게도 빈 면은 사람을 요리하게 만든다.

셋째 날 밤, 나는 창가에 선반 하나를 더 얹으려다 포기했다. 높이를 잘못 재면 머리를 부딪칠 게 뻔했다. 대신 두께 1cm 철제 트레이를 구해 가스레인지 옆에 얹었다. 뜨거운 냄비를 잠깐 내려놓을 수 있는 자리, 그거 하나로 조리 과정의 급한 숨이 잦아들었다.

4~7일차: 동선의 중심, 설거지

나는 설거지를 싫어하지 않는다. 다만 설거지를 시작하기까지가 멀다. 그 거리감을 줄이기 위해, 4일차에는 설거지 세제와 수세미를 한 손 닿는 곳으로 옮겼다. 싱크볼 안쪽에 붙어 있던 고무거치를 떼어 내고, 수도꼭지 기둥 뒤에 작은 자석 선반을 붙였다. 팔을 뻗을 필요가 없었다. 설거지의 시작은 “눈앞에 있는 것”으로 결정된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6일차 저녁, 나는 접시 두 장을 버렸다. 가장 예쁜 접시였지만, 말리고 세워둘 자리가 없었다. 대신 얇고 같은 크기의 접시 네 장을 들였다. 설거지 바구니는 접시 크기와 함께 작아졌다. 물 튀김이 줄어들고, 주방 바닥의 미끄러짐도 사라졌다. 최소화가 멋져 보이려면 “같은 크기”라는 작은 규칙이 필요했다.

8~12일차: 불 대신 시간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으면 주방이 더 좁아진다. 그래서 8일차부터는 열 대신 시간을 쓰는 요리로 방향을 바꿨다. 밤에 채소를 썰어 밀폐용기 두 개에 나눠 담고, 다음 날 아침에 하나는 냉장, 하나는 냉동으로 보냈다. 귀가 후에는 냉장 보관한 것부터 프라이팬에 바로 넣고, 뚜껑을 덮은 채 약불로 두었다. 그동안 나는 욕실에서 손을 씻고, 가방을 벗고, 플레이리스트를 골랐다. 불 앞에서 초조하게 서 있지 않자, 주방이 덜 좁았다. 공간이 넓어진 게 아니라, 사람이 사라진 시간이 생긴 것이다.

10일차에는 전기주전자가 주방의 주인공이 됐다. 파스타 물을 끓일 때, 전기주전자에서 먼저 물을 데워 냄비에 부어 주면 가스레인지가 점령하는 시간이 줄었다. 가열 시간이 줄어들면 주방의 소음도, 열기도 줄어든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이 덜 뜨거워진다. 그 덕분인지, 나는 설거지도 바로 하게 됐다.

13~16일차: 냉장고는 서랍이다

13일차, 냉장고 문을 열자 반가운 얼굴이 없었다. 유통기한을 과거형으로 말하는 소스들만 눌어붙어 있었다. 나는 냉장고를 서랍처럼 쓰기로 했다. 가장 많이 쓰는 재료를 눈높이 한 줄에만 모으고, 나머지는 아래칸에 “주말용”이라고 라벨을 붙여 묶었다.
라벨은 흰 테이프와 검은 펜이면 충분했다. “주말용”이라는 단어를 붙이자, 평일 저녁 메뉴가 저절로 가벼워졌다. 심지어 토요일이 기다려졌다.

15일차에는 투명 밀폐용기로 1인분 분량을 맞췄다. 양파 반 개, 파프리카 반 개, 두부 반 모. “반”의 리듬이 요리 시간을 일정하게 만들었다. 양이 일정하니 프라이팬의 자리가 일정하고, 익는 시간이 일정하고, 내 손의 동작도 일정해졌다. 작은 주방은 예측 가능한 패턴을 좋아한다.

17~19일차: 냄새와 불빛

주방이 좁으면 냄새가 집 전체의 기분을 결정한다. 17일차에는 환풍기 필터를 새로 갈았다. 교체하고 나니 팬 소리가 작아졌다. 그날 밤, 생선 굽기를 시도했고, 실패하지 않았다. 냄새는 더 빨리 나갔고, 남은 건 소금과 레몬의 향뿐이었다.

불빛은 다음 날의 문제였다. 형광등은 밝았지만, 그림자가 딱딱했다. 18일차 밤, 나는 상부장 밑에 USB 간접조명 바를 붙였다. 손등을 비추면 칼끝이 뭉개지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가장 위험한 건 어두움이 아니라 거친 빛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20~21일차: 주방이 말로 걸어오는 순간

마지막 이틀은 요리보다 정리에 가까웠다. 칼과 도마, 프라이팬, 국자, 집게. 진짜 매일 쓰는 것만 레일 바에 걸었다. 보는 즉시 손이 갔다. 쓰지 않는 것들은 상자에 들어갔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기준으로.

21일차 저녁, 나는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전기주전자가 물을 먼저 끓였고, 프라이팬에서는 마늘과 올리브오일이 조용히 익었다. 가스레인지 옆 트레이는 뜨거운 냄비를 잠시 쉬게 해 주었고, 간접조명은 접시에 떨어지는 소스를 부드럽게 비췄다. 설거지는 7분 만에 끝났다. 주방이 마침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면, 우리 둘이 해 낼 수 있겠지.”


이후에 배운 것들(요약 메모)

  • 공간을 넓히는 건 새 가구가 아니라 빈 면이다.
  • 설거지는 싫은 일이 아니라 쉽게 시작되는 일이 돼야 한다. 팔 길이 안에 있으면 된다.
  • 불 대신 시간을 쓰면, 사람이 주방에서 사라지는 시간이 생긴다. 그 시간이 여유다.
  • 냉장고는 보관창고가 아니라 오늘과 주말을 구분하는 서랍이다.
  • 좁은 주방의 안전은 부드러운 빛예측 가능한 패턴에서 나온다.

오늘 바로 해볼 수 있는 10분 루틴

  1. 가스레인지 옆에 얇은 트레이 하나 놓기(뜨거운 냄비 임시 주차장).
  2. 설거지 도구를 수도 기둥 뒤 자석 선반으로 이동.
  3. 냉장고에 “주말용” 라벨 붙여 재료 한 줄 묶기.
  4. 채소는 1인분 단위로 투명 용기에 담아 눈높이 칸에 두기.
  5. 상부장 밑에 간접조명 바 하나 붙이기.

주방의 넓이는 숫자로 측정되지만, 사용감은 이야기로 쌓인다. 21일 동안의 작은 수정을 거치며, 나는 이 좁은 공간과 타협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리듬을 맞췄다. 이제 퇴근 후 문을 열면, 프라이팬은 창틀이 아니라 불 위에 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언젠가 넓은 주방이 생기면 요리할 텐데”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 여기서 요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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